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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근친혼이 성행하여 가계도가 너무 복잡합니다.-.  
3인의 여왕에 대해 요약하면,
선덕여왕(27대 632~647 16년)
 신라시대 3인의 여왕중 최초의 여왕, 성은 김. 이름은 덕만.진평왕의 둘째딸(삼국사기에는 첫째딸) 김춘추에게 중국 당나라의 원군을 청하게 하여 백제를 침공하고, 9년(640)에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어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여왕통치에 대한 불만은 647년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의 진골귀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폭발하였다. 그러나 이는 김춘추(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사이에서)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

진덕여왕(28대 647~654 8년)
마지막 성골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왕이된 성골 진덕여왕(이후에도 성골은 있었으나 왕이 될수없었습니다.) 김춘추가 진골최초로 왕(태종무열왕)에 오르고 부자상속제로 진골이 왕과 관직을 독점하게 됩니다.그리고 그의 아들 김법민이 문무왕,
성은 김씨. 이름은 승만, 진평왕의 친아우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며(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입니다.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진성여왕(51대 887~897 11년)
48대 국왕이었던 경문왕의 딸이었습니다.49대 헌강왕, 50대 정강왕의 누이동생이기도 하죠.경문왕은 문의왕후 김씨와 3남 1녀를 낳았는데
첫째는 정강왕, 둘째가 헌강왕, 셋째가 왕자 윤, 딸이 진성여왕입니다.
 순서를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진성여왕은 두 남자형제인 정강왕, 헌강왕이 일찍 죽어 왕통이 끊어지자 타의에 의해 왕이 되었습니다.
  진성여왕이 즉위한 뒤 모든 권력은 남편인 위홍이 가지고 있었고,  위홍이 죽고 난 이후에는 귀족세력이 왕권을 장악하여 실제 여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었습니다.
50대 정강왕(몸이 약하여 2년여의 짧은 재위기간)의 후사가 없어 신라조정에서 심의결과 가장 가까운 핏줄인 진성여왕(마지막 여왕(본명(김만))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재위 기간 중에 나라가 혼란에 빠졌으며 후삼국으로 다시 나누어지게 되었다. 888년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다
  진성여왕에 대해 음란하고 부도덕하다는 기록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그 출처를 두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첫째, 진성여왕이 자신의 숙부이며 유모의 남편인 각간 김위홍과 혼인한점.
둘째, 각간 위홍 사후에 젊은 남자를 가까이 한 점.
셋째 이 여왕의 젊은  애인들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여 신라사회를 혼란하게 만든점때문입니다

백제멸망이 660년 고구려가 668년
통일신라가 아닌 그냥 신라시대이며 신라시대때만 여왕이 있었습니다.
 
진평왕은 딸만 셋이었다
첫째:덕만(선덕여왕)
둘째:천명(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
세째:선화(백제 무왕의 아내)

   덕만 공주는 너무나 잘알고있는 선덕여왕이다. 우리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사람이다
   천명공주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이다. 일찍 사촌인 용춘과 결혼해서 김춘추를 낳았다. 김춘추는 신라역사상 최초의 진골출신왕이며.김유신과더불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선화공주는 그유명한 서동의 아내이다. 무왕(서동)은 백제역사상 신라를 제일많이 공격한왕이다. 장인의 나라를 수없이많이....그러나 부부의사랑은 남달랐다고한다. 불행하게도 아들 의자왕에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진평왕의 세딸들 모두 가공할만한 사연을 지녔다.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는  역할을 해야만했다...그런데 딸은 셋이라고 보는게 맞는 듯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딸이며 서동의 아내로서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활을 한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선화공주는 정말 진평왕의 딸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무왕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는 셈이고 과정이야 어찌 됐든간에 백제와 신라 양국은 일종의 결혼동맹을 맺은 것이되겠죠!!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 어디에도 무왕과 진평왕이 사위와 장인 사이임을 나타내는 말이 없고 또 당시에 결혼동맹을 맺었든 내용도 없습니다...때문에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데

선화공주의 신라 진평왕의 딸인지, 백제 법왕의 딸인지 진평왕의 딸로서 백제 무왕(서동)의 아내이면서 장인의 나라인 신라를 수없이 공격할 수 있다니(아무리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해도,그렇다면 선화공주가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미스테리네요.
관련 내용은 아래에 나와있습니다.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15&eid=9BuqLmrBFWsegh1x1lxGdL+DrC84MjcW&qb=vLHIrbD4wdY=

선덕여왕에 대해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오히려 그 실체가 거의 간과되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녀의 영민함에 대한 에피소드, 즉 당태종이 보낸 모란꽃의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의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고사 외에 통치자 선덕여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선덕여왕 시기가 신라 최고의 문화 전성기였다는 사실이나 선덕여왕이 바로 신라 삼국통일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있었기에 신라는 한반도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를 둘러싼 남자들을 카리스마로 단단히 움켜잡고 자신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이룩해낸 통치자였다.

- 어렵게 획득한 왕권  7세기 초엽 신라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원래 신라의 왕위는 부모 양쪽이 모두 성골이어야만 하는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으로 성골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7세기에 들어서면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성골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딸 승만(후일 진덕여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성골남자가 없다는 것은 성골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성골 다음 계급인 진골 남성 중 유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러나 화백회의는 당시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이던 진골의 김용춘을 왕으로 추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평왕의 딸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남성 지배 중심의 고대 사회에 여성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특히 남성 귀족들만으로 이루어진 화백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덕만공주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한 것은 파격 그 이상이었다. 화백회의는 김용춘과 덕만공주를 두고 군왕의 자질을 여러 차례 저울질하였지만 결국 덕만공주의 능력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나라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왕의 자질, 즉 통치자의 카리스마를 덕만공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계급은 성골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왕위를 덕만공주는 자신의 능력으로 당당히 획득했다.

- 탁월한 인재등용   왕위에 오른 후 선덕여왕이 보여준 군왕의 능력은 바로 인재등용에 있었다.
  그녀는 남성중심사회의 여성통치자라는 취약점을 자신을 둘러싼 남성들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해결했다. 선덕여왕 옆에는 그녀의 카리스마 날개 아래 유순하게 그녀를 모시는 두 마리의 맹수가 있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그들이다.

  선덕여왕은 먼저 김춘추를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옆에 두었다.

왕위를 두고 경쟁했던 김용춘의 아들이었던 김춘추는 선덕여왕에게 가장 큰 정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지 않고 그를 최고의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였다. 김춘추에게 외교전반에 대해 전폭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정적을 곁에 두면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선덕여왕의 탁월한 카리스마요, 용병술이었던 것이다. 선덕여왕 재위 시 김춘추는 단 한번도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가장 충실한 신하로 성실히 복무하였다.

또 한 명 선덕여왕의 탁월한 인재등용을 보여주는 사람은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원래 신라에게 멸망당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김유신 가문은 가야멸망 당시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계급체계에 충실하고 배타적이던 신라의 귀족들에게 멸망된 가야의 왕족은 쉽게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김유신은 명목상 진골일 뿐 차별받는 이방인이었다.

  선덕여왕은 그런 김유신을 발탁하여 그에게 군사권 전체를 맡긴다. 신라의 순수 귀족이 아닌 김유신에게 군사권을 맡기는 것은 어쩌면 국가 전체를 위협하는 파격적인 인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능력만으로 평가하고 합당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멸망시킨 왕국의 왕족을 가장 충직한 신하로 삼을 수 있었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그를 충분히 견제하고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뛰어난 외교 전략으로 나라를 지키다.
  선덕여왕 재위 때 신라는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한다. 웅대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조각들이 이 시기에 속출한다.
정치적 안정이 문화적으로 꽃핀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신라의 국외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원래 삼국 중 영토가 가장 작고 국력이 약했던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과 백제의 중흥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국가의 존립이 문제되던 시기였다.
   이때 선덕여왕은 과감하게 견제와 긴장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외교술을 펼친다.
김춘추를 일본과 당나라로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배후에 동맹관계를 결성해 쉽사리 신라를 침범할 수 없는 외교적 방어선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적절한 외교를 통해 국외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은 신라는 부지런히 국력을 키워 마침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 그러나 고독했던 여왕
선덕여왕의 정치적 성공은 그녀의 개인적 삶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여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결혼을 하지 않았고 후사를 남기지도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재미있는 고사가 하나 전한다.

   지귀라는 젊은 청년이 선덕여왕을 짝사랑하여 그만 상사병에 걸렸다.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간 여왕은 지귀에게 알현을 허락하였다. 여왕이 불공을 마치고 나와보니 기다림에 지쳤던 지귀는 그만 잠이 들어 있었다. 선덕여왕은 지귀를 깨우지 않고 그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주고 돌아갔다. 뒤늦게 잠에서 깬 지귀는 자신을 원망하며 타오르는 사랑을 진정치 못해 불타 죽었다.

이 고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선덕여왕은 매력과 미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녀로 인해 마음이 불타 죽을 정도였다면 어지간히 남자의 속을 태우는 매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사랑하였으나 정작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정을 줄 수가 없었다. 만백성을 다스리며 만백성의 연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왕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들지 않는 것이 국가 안정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택한 독신의 길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택한 사랑법이고 통치자로서의 카리스마였다.

선덕여왕의 존재감은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불리한 입장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절대 놓아 버리지 않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강인하고 총명한 여인이었고 고독을 감수하면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 타고난 정치가였다. 선덕여왕은 새로운 시대로 향해가기 전 징검다리로서 여왕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진 여성이었다.

진덕여왕에 대해
   신라는 무열왕 김춘추 이전엔 오직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즉 부모 모두가 왕족인 사람을 말하죠. 이런 전통을 지키려다 보니 비록 여자지만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왕이 된 겁니다.  그런데 이후 문제가 터지죠. 진덕여왕이 자식을 남기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진골 즉 부모 중 한쪽만이 왕족인 사람을 왕으로 삼아야 했는데 이 당시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고 김유신 등 든든한 '빽'이 있었던 김춘추(진골)가 무열왕이 된 것입니다.
   진덕여왕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사신의 파견을 통하여 중국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하여왔다.
이에 신라는 압독주(押督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이던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게 하는 한편, 648년(진덕여왕 2)에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宿衛外交)를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지금까지 신라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이던 당나라의 태종(太宗)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김춘추의 당나라에서의 외교활동은 결과적으로 신라 내정(內政)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여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를,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太和)를 버리고 비로소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였던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의 관제와 연호의 사용 등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651년에 백관(百官)의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와 품주(稟主)를 개편한 집사부(執事部)의 설치는 왕권강화의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 개혁으로 김춘추·김유신 일파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었다.

진성여왕에 대해

신라 재정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은 48대 경문왕의 딸로 정강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진성여왕의 왕위계승은 어린 효공왕의 성장을 기다리는 임시적 성격을 띠었다. 진성여왕은 당시 전해 오는 향가를 모아 삼대목을 편찬했다. 이는 어지러운 신라를 바로 세우고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최치원을 비롯한 6두품을 중심으로 중앙 정치 개혁을 이루고자 했으나 진골 세력의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또한 선종 불교에 관심을 기울여 지방 세력을 회유하는 등 난국 타개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전대부터 누적된 반신라·반국가 세력의 확대로 결국 신라는 더욱 어지러워진다. 이에 진성여왕은 헌강왕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신라여왕에 대한 미스테리와 흥미,최초의 여왕,마지막 여왕 등 흥미로운 내용도 많은데, TV 사극으로도 나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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