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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7대 불가사의는 BC 2세기께 비잔티움의 수학자 필론이 쓴 '세계의 7대 장관'에 나오는 곳으로 통상 헬레니즘시대 말기와 로마제정시대에 만들어진 7가지의 경이로운 건축과 조상을 일컫는다.
 
    첫번째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피라미드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로 BC 2575~2565년게 나일강 서안의 바위 고원에 세워진 이집트 제4왕조의 세 피라미드다.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왕 쿠푸의 것으로 밑변 평균 길이 230.4M에 원래 높이는 147M에 이르는 최고 최대 피라미드다. 나머지 두 피라미드도 각각 밑변 216M에 높이 143M, 밑변 109M, 높이 66M에 이른다. 4각형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을 쌓아올려 한 정점에서 만나도록 축조한 기념비적 구조물로 여러 시대에 걸쳐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서아시아·그리스·키프로스·이탈리아·인도·타이·멕시코·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의 몇몇 섬에 지어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터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岩窟)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의 피라미드 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변이 63m인 직사각형 석조 마스터바로, 중앙에 깊이 28m의 수혈(竪穴)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결국 마스터바를 6단 포개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 이 62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플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彼岸)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약 90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태양신과의 결부는 후의 정통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다.
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각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葬祭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제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이 남쪽에는 계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었다.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돌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돌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두번재는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정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세미라미스 공중정원

   BC 500년쯤 서아시아 바빌론의 성벽에 있었던 계단식 테라스로 정원위에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길어올려 만든 인공정원이었다.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 성벽(城壁)에 건설한 기이한 정원으로 <공중정원(空中庭園)> <낚시뜰>이라고도 한다.
   이름처럼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풀과 꽃, 수목을 심어놓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파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 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 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각종 기록을 더듬어 보면 그것이 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기단(其壇)의 한 모서리의 길이가 100m를 넘었고, 높이 15m의 토대(土臺)를 쌓았으며 그 위에 층상(層狀)의 건조물(建造物)을 세우고, 제일 위의 노단(露壇)은 넓이 60㎡, 높이 105m로 30층 건물 높이와 같았다고 한다.
   각 단(壇)마다 거름흙을 운반해서 화단과 수림을 만들어 놓고, 유프라테스강에서 퍼 올린 물을 탱크에 모았다가 관수했다고 한다.

이 피라미드와 같은 노단의 외곽은 공랑(控廊)의 형태를 가졌고 그 내부에는 크고 작은 많은 방과 동굴ㆍ욕실 등이 있었으며, 벽체(壁體)는 벽돌에 아스팔트를 발라 굳혀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단부분을 둘러싼 평지에는 흙을 쌓아 올려 크고 작은 나무를 심어 놓았으며 이러한 노단이 마치 숲에 덮힌 작은 언덕과 같아 보인다.
그것이 바빌론의 평야 중앙부에 마치 하늘에 걸쳐 있듯이 높이 솟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공중정원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 정원은 일명 현수원(懸垂園)ㆍ수하원(垂下園)이라고도 부른다.

    세번째는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제우스신상


 BC 457년께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의 제우스 신전에 있던 신상으로 무려 8년여에 걸쳐 완성됐다고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를 믿었다.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며,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4년마다 지내는 올림픽)를 지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앨리스 등의 도시 국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했지만 뒤에 제우스 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B.C 457년에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에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안치하였다.
   페이디아스는 아테네 화가 카르미테스의 아들로 파르테논 신전의 정면 입구와 소벽을 조각한 당대 제일의 조각가였다.
그리스 고전전기(古典前期)의 숭고양식(崇高樣式)을 대표하는 페이디아스는 신(神)들의 상을 많이 만들어 ‘신상 제작자’로 칭송받은 사람이다.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페이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 상을 완성했는데, 그는 제우스의 신성함 위엄과 함께 너그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어떤 고대인은 제우스상을 보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도, 불행과 비극에서 헤어 나지 못하는 사람도 만약 우뚝 서 있는 제우스상을 보게 된다면 고통과 절망을 잊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감상을 토로했다고 한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 개씩, 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 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우스 상은 높이가 90㎝,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4m 되는 상은 거의 천장을 닿고 있다.
   제우스 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그 위에 보석과 흑단,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 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제우스신상

오른손에는 황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Nike)상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426년에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교신전파괴령에 의해 신전이 헐리게 되었다.
게다가 522년과 551년의 지진으로 크로노스 언덕이 허물어졌고, 그라데오스 하천의 범람으로 신역은 3~5미터 아래 모래층으로 매몰되어 제우스 상은 오늘날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네번째는 소아시아의 도시 에페소스에 세워졌던 아르테미스 신전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은 처녀와 정절,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인 아르테미스를 모시기 위해 에페수스 사람들이 범국민적으로 건설한 신전으로 기원전 6세기 중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 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12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신전은 높이 20미터 정도로 백색의 대리석을 깎아, 127개의 기둥을 이오니아 식으로 세우고 지붕을 이어 만들어졌다.
   이것이 세워지고 난 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곳을 방문하여 보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에리스에 있는 라비린토스 등 세계적인 걸작에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걸작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원전 356년 10월,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후세에까지도 유명해질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고의적으로 이 신전에 불을 질렀다.
신전이 불타버리자 디나크라테스는 재건에 바로 착수했는데 이때 에페수스에 살고 있는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의 귀금속을 팔았고, 각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특히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던 알렉산더 대왕은 완성 중이던 이 신전에 마음이 빼앗겨 자기의 이름으로 이 신전을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공언했으나, 이방의 신전을 에베소에 세울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 복구 사업을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삼고,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나 더 크고 빼어난 신전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르테미스 여신 '사냥후에 휴식'

에페수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높이 10미터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높이 18미터짜리 기둥을 127개 사용하였고 길이나 폭도 파르테논 신전의 두배 정도로 만들었다.
건축 자재는 가장 순도가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대리석 계단을 사방으로 내서 중앙의 홀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이 신전이 기원전 250년 경에 완성되자, 곧바로 전세계에 그 규모와 화려함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에페수스시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더불어 시가지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으로도 유명하여 관광 명소가 되었다.
에페수스 항구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배들과 교역을 위한 상인들로 넘쳤다

   
    다섯번째는 소아시아 인근 로도스항구에 세워진 36M높이의 크로이소스 청동거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크로이소스 거상

B.C 407년경 로도스섬은 도시국가연합(Rhodo-Egyptian)의 수도로 건설되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그들의 주요한 동맹국(Ialysos , Kamiros , 그리고 Lindos)과 함께 지중해 유수의 무역중심지로 발전하였다.
   B.C 305년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는 동맹을 깰 방법으로 도시를 관통할 수 없게 로도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도시국가연합은 마케도니아를 무찔렀고, 그들의 단일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장비를 팔고, 모은 돈으로 높이 36m의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상(철로 보강하고 돌로 무게를 더함)을 세워 로도스의 거상으로 알려졌다.
   상상에 의해 만든 한 돋을새김 작품이 표현하듯이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항구 입구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 있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은 중세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크로이소스 거상

거상의 건설은 린두스 시(市)의 찰스가 12 년에 걸려 B.C 282 년에 끝마쳤다. 이 거상은 B.C 225년경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고, 거의 한 천년간동안, 상이 파괴된 채로 놓여있었다.
   A.D 654년 아랍인이 로도스를 침범하여 부서진 대거상의 나머지를 분해하고, 그들은 시리아의 한 유태인에게 팔았다. 거상 조각이 시리아로 900 낙타의 등위에 운송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여섯번째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알렉산드리아 항구 근처 작은 섬 파로스에 세운 135M  파로스등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파로스 등대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다 .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등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단한 돌로된 등대가 무너진 것은 12c경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1100년과 1307년의 두차례의 큰 지진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반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그 모습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일곱번째는 마우솔로스 영묘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우솔로스 영묘

소아시아의 남서부에 있던 카리아의 통치자 마우솔로스의 영묘(靈廟)로서 그의 누이이며 미망인인 아르테미시아가 BC 353경~351년경에 지었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大)플리니우스(23~79)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4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마차가 올려져 있었다.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적의 단편으로는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장면을 새긴 프리즈와 마우솔로스 상으로 보이는 높이 3m의 조상 등이 있다.
   이 영묘는 아마도 11~ 15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무너진 돌은 이 지방의 건물을 짓는 데 다시 사용되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그 유품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있다.
현재에 이르러 마우솔레움은 무덤건축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우솔로스 상과 아르테미시아 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고대7대불가사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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